Antonio Carracci (1583-1618). "The Samaritan woman at the well" (c. 1595) Oil on canvas. 170X225cm. Pinacoteca di Brera, Milan.
<이 준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오늘은 새벽예배를 마치고 오랜만에 산책로로 나갔습니다. 형제님, 산책로에 나가면 절 기분 좋게 하는 것들로 가득합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드릴까요? 그곳엔 건강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의 매일 아침 걸어서인지 그분들의 몸에선 수풀 냄새가 납니다. 지나치면서 인사를 나누면 그분들의 입에서 나온 덕담이 제 가슴을 상쾌하게 만들어줍니다. 형제님, 참 놀랍지요. 그 짧은 한마디 말 안에 그렇게 큰 힘이 담겨있다니 말입니다. 산책로엔 건강한 기운이 넘칩니다. 산책로 양옆을 빼곡이 메운 나무들이 뿜어대는 피톤 치드라 부르는 물질 때문에도 그렇지만, 막 잠에서 깨어난 살아있는 것들의 생동감이 숲 전체를 건강하게 만들어줍니다. 바스락거리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다람쥐들, 인기척에 놀라 겅중겅중 숲 속으로 뛰어드는 사슴들, 고개를 들고 막 봉우리를 열고 있는 들꽃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의 출발선이 되어준 황금빛 아침 햇살들. 산책로를 메운 이 소중한 풍경들을 대할 때마다 종종 형제님 생각이 납니다. 이 건강한 숲길을 걸으면서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얘기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간절함 때문입니다.
형제님, 우리는 두 주 전부터 아담이 지은 범죄 때문에 이 땅에 다시 찾아온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대해 나누고 있습니다. 기억하실 겁니다. 오늘 편지에선 “공허”에 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 ‘성경 말씀’을 가지고 말입니다.
형제님, 전 성경을 생각할 때마다 참 신비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는 무려 40명이 넘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약 1,600년이라는 긴 기간에 걸쳐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66권으로 이루어진 성경 내용 전체가 한 주제를 중심으로 통일되어 있는 겁니다. 또한 지금까지 원문을 수정했다는 기록을 찾아볼 수도 없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형제님, 더 놀라운 것은 지구촌 어디를 가도 성경을 진리로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천차만별이겠지만, 결국엔 누구나 성경을 진리로 믿게 되는 겁니다. 형제님,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성경은 오류가 없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쉬시는 장면을 만나게 됩니다. 형제님, 전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찡해집니다. 천국 보좌에서 온 우주를 운영하시던 하나님께서 굳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가 겪는 모든 불편함을 똑같이 경험하며 힘들어하시는 모습이 너무 죄송한 겁니다. 우리 인간을 죽음에서 건지기 위해 직접 이 땅에 뛰어드신, 그것도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그 위대한 사랑 앞에서 어쩔줄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 위대한 희생을 통해 내게 주신 구원의 은혜, 그 무한한 크기의 은혜가 몰려들어 감사와 감동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습니다. 형제님에게도 이런 은혜가 임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때 한 여인이 그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옵니다. 사마리아 여자였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개처럼 취급하고 상종하질 않았습니다. 남성 중심의 유대 사회에선 여자들을 아주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자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그 여인도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죄와 사망에서 구원되어야 할 불쌍한 사람으로만 비친겁니다.
대화 중 주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너라.” 여인의 영혼을 관통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여인에겐 남편이 이미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함께 살고 있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었던 겁니다. 여인은 무언가 빈 듯한 자신의 인생을 성적 쾌락으로 채워보려고 했던 겁니다. 하지만 남자들을 아무리 바꿔보아도 그 공허함을 채울 수는 없었습니다. 갈증만 더 깊어질 뿐이었습니다. 형제님, 주님은 여인을 향해 귀한 말씀을 주셨어요. “내가 주는 물, 생수를 마신다면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거야. 이 생수를 마시는 순간, 너의 영혼 속에 영원히 샘솟는 샘물이 생길 것이니 말이다.” 드디어 여인의 눈이 열렸습니다. 지금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분이 바로 메시아, 이 땅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깨달았던 겁니다.
형제님,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여인의 삶을 꼭 닮아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이 세상에 취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동기가 다 비슷해보입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속으로 부르짖으며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 겁니다. 세워놓은 목표가 이루어져도 기쁨은 잠시일 뿐, 다시 공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형제님, 돈이면 돈, 권력이면 권력, 명예면 명예, 결코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욕망인 겁니다.
톨스토이가 쓴 단편 소설 하나가 떠오릅니다. 자신이 발로 밟고 돌아 온 땅을 몽땅 거저 준다는 방이 붙었습니다. 해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 와야만 한다는 조건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도전했습니다. 그는 되도록이면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멀리멀리 달려갑니다. 그러다가 퍼뜩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태양을 발견하곤 급하게 몸을 돌려 출발점을 향해 뛰기 시작합니다. 지친 다리와 터질 것 같은 심장은 자꾸 쉬라고 말하지만, 욕망으로 가득한 머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간신히 해가 지기 전에 출발점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지나치게 무리한 사내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가 차지한 땅은 지신의 몸이 묻힌 한 평이 약간 넘는 공간 뿐이었습니다.
형제님,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그 사내가 살아서 땅을 차지했다면 100% 만족했을까? 만족 못했을 겁니다. 그때 조금 더 달렸다면, 그때 점심을 먹는다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때 더 비옥한 땅 쪽으로 달렸다면…이런 생각들이 그를 괴롭혔을 겁니다. 형제님, 인간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에 눌려 영혼이 병들어가는 사실도 모르고 죽어가는 겁니다. 무서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형제님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삶에서 공허와 욕망의 주머니를 제거하고, 대신 만족과 기쁨으로 채워주시는 분이 계시니까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지금까지 자신의 갈증을 채워주던 물동이도 버려둔 채 마을로 뛰어 갔습니다. 주님 때문에 그녀의 끝없는 목마름이 치유가 되었던 겁니다. 형제님도 예수님만 믿으시면 됩니다. 그럴 때 형제님의 삶은 공허로부터 자유한 만족의 삶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축복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