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봉주 편집장>

 

 

어김 없이 올해에도 시카고엔 겨울이 왔고 혹독한 추위와 함께 눈도 왔습니다. 시카고다운 눈은 아직 안 오고 있지만 눈만 오면 우린 누가 눈을 치울 것인가를 놓고 눈치 싸움을 합니다.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옆집까지 눈을 치워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그런데 우린 이제 더 이상 그런 감정의 소모 싸움을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옆집—사실 우리 옆집은 엄마와 딸, 두 여자만 사는지라 특히 눈 오는 날이면 눈 치우는 일이 힘겨운지 집 앞길이 막히는 일이 많아요--까지도 눈을 치워주어 동네 사람들과 강아지들이 겨울날 눈길에도 안전하고 편하게 산책을 할 수 있도록 인도를 내주고 있습니다.

 

또 한편의 다른 집. 우리 길 끝집인 그 집은 길이 끝나는 두 길이 만나는 모퉁이 집이라 양쪽 길의 눈을 다 치워야 해서 치울 눈도 많습니다. 허나, 눈이 오기 시작한 요새 통 눈을 치우는 모습이 보이질 않습니다.  두 노인 부부가 살고 있는 그 집은 지난 겨울 이래 할아버지가 다리를 다쳤는지, 할아버지는 여름 내내 보행기를 끌고 천천히 걸으며 할머니를 앞세우고 산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 집도 눈을 치워 주기로 했습니다. 바로 옆집의 Lydia와 먼저 보는 사람이 먼저 눈을 치워주기로 한 것입니다.

 

Lydia는 몸집도 작고 젊은 여자가 눈 치우는 기계도 없이 눈삽으로만 눈을 치운다던데, 언젠가 남편이 눈 치울 때에  나오더니 우리 집 눈까지도 같이 치워주겠다고 했답니다. 참 대단한 여자라고 생각했습니다. 평소에도 우리는 Lydia를 “아마조네스 (Amazoness=아마존의 여전사)”라고 불러왔습니다. 왠만한 마당 일은 그녀의 남편 도움 없이  혼자 다 하는 것 같아요. 언젠가 흙 포대자루를 어깨에 메고 옮기는 씩씩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우리 부부가  붙여준 별명입니다. 그녀에게 이 이야기를 해 줬더니, 그녀의 새로운 닉네임이 좋다며 무척 흡족해 했습니다. 그녀의 남편, Joe는 자신을 “Ox”라고 부른다며.  오늘 그집 앞에서 눈을 치우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남편에게 “다음에 눈 오면 우리가 이 집 눈을 치워 주자. 우리에겐 눈 치우는 기계도 있으니 눈삽으로 치우는 것 보다는 우리가 치워주는 게 더 쉽지 않냐”고 하며. 남편도 기분 좋게 동의했습니다.

 

문득 예전에 우리 동네에서는 동네 사람 몇몇이 눈 치우는 기계를 공동구매하여 함께 눈 치워주던 기억이 납니다. 나도 그 공동구매에 함께 참여하고자 하였으나, “어차피 너는 이 큰 기계를 사용하지도 못한다. 우리가 돌아가며 너희 집 앞까지 눈을 치워주겠으니, 너는 가끔 우리에게 따뜻한 핫쵸코렛이나 대접해 주렴.”하던 옛 이웃이 생각납니다. 우리 바로 옆집의 Norm 아저씨, 그 옆집의 Winnie 할아버지--원래 이름은 Winston인데 “Winnie the Pooh”의 그 이름이라며, 굳이 자신을 “Winnie”라고 불러달라고 했었죠--, 그리고 그 길 건너집 할아버지, 우리집 길 건너편의  Mark네와 그 옆집 아저씨 등 –이 두 이웃의 이름이 기억 안 납니다. 이 다섯 집 중 두 집은 은퇴 후 다른 곳으로 이사갔고, Winnie 할아버지는 돌아가셨지요.

 

Winnie 할아버지는 항상 하루에 두번, 아침, 저녁으로  애견을 산책 시키는 일이 일상이어서 만나는 일이 많았습니다. 봄이 되어 집 앞 마당에서 잡초를 뽑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면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얼른 그의 잡초 뽑는 삽을 갖고와 나랑 같이 우리 집 마당의 잡초를 함께 뽑아주었었지요. 나이 드신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인터뷰하라는 아이들의 숙제에 기꺼이 응하여 도와주기도 했던 Winnie 할아버지와 그의 부인, Peony 할머니. 나중에 완성된 숙제를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고 학교 교사였던 그들의 아들에게까지 보여주며 자랑하던 그들의 호들갑스럽기까지 했던 친절함과 무한 칭찬에 멋적기도 했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나의 퇴근 시간이 늦어져  학교 끝나고도 아이들을 내가 픽업 못하면 바로 옆집이었던 Norm은 그의 집문을 열어주고 아이들을 봐주는 친절함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만일의 경우 우리 집과 그의 집 열쇠를 우리끼리만 아는 비밀의 장소에 놔두고 비상시를 준비하자고도 했습니다.

 

우리 딸 아이의 사진과 함께 커다란 인터뷰 기사가 Chicago Tribune 지에 실리자 나보다도 더 기뻐하며 그 기사를 오려 나에게 갖다주기까지 한 Mark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Mark 네는 할로윈에나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예쁘게 집 앞을 장식하는 미적 감각이 대단한 집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왕래를 제한하던 코로나 시대였던 작년 늦가을에, 이상하게 그의 집 앞에 차들이 많이 몰려 있는 걸 보곤, 그 며칠 후 왠일이었냐며 Mark에게 물었더니, Mark의 부인, Debbie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Mark 네는 그해 할로윈 장식도, 추수감사절 장식도, 크리스마스 장식도 하지 않고 밋밋하게 작년 연말을 쓸쓸히 보냈습니다. 며칠 전, 나는 Debbie에게 안부를 묻는 카드를 보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소식에 심심한 위로를 보내며, 상심이 크겠지만 내년엔 너의 집을 다시 아름답게 장식하여 동네 사람들에게 눈 호강을 시켜달라는 나의 손편지 글과 함께.  

 

봄이 되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다 바깥으로 나와 마당에 꽃을 심고 저마다 집을 예쁘게 꾸밉니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던 작년 여름엔 집 앞에 의자와 탁자를 내놓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철저히 엄수하며 만남과 대화의 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어떤 집은 아예 차고를 교제의 장소로 꾸미고 TV까지 걸어 놓고 자신의 차고를 동네 사람들에게 개방하여 와인도 같이 마시며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기도 했습니다.

 

겨울이 되고 눈이 오면 우리 동네 사람들은 선한 이웃이 됩니다. 아니, 원래 선한 그들이 눈을 치워야 하는 일에 그들의 선함이 더 드러나는 거겠지요. 그리고 나도 덩달아 착해져서 그들이 예전에 나에게 베푼 고마운 일들을 떠올리며 고마운 마음이 더 커지는 거겠지요. 그 고마운 빚을 이제 똑같은 그들에게—세월이 흘러 이 세상을 떠났거나 다른 곳으로 떠났으므로-- 직접 되갚을 수는 없어도, 내가 받은 고마운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베풀며 선행을 흘려 보내야 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늘도 밤새 눈이 많이 와, 아침에 문을 열어보니 눈이 꽤 쌓였더군요. 마침 나가보니  옆집의 Lydia가 눈길을 아직 치우지 않았나 봐요. 나는 얼른 눈삽을 들고 우리집 앞은 물론 양 옆집의 인도까지 거뜬히 눈을 치웠습니다. 그리곤 어제 재워놨던 불고기를 Lydia네에 주고 왔습니다. 지난 여름에 Lydia와의 대화 중, 그녀가 글루텐에 앨러지가 있다는 걸 기억해서 글루텐이 안 들어간 간장으로 그녀만을 위한 불고기 양념을 만들어 재워논 것입니다. 그걸 또 기억해주다니, 참 사려 깊다며 맛있게 먹겠다고 고마와 하며 받아주는 Lydia와 올 여름에는 두 집이서 꼭 바베큐 파티를 하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오늘도 또 하나의 선행을 한 내 마음이 무척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