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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부.jpg

 

 

 

 

<문봉주 편집장>

 

고모부는 저의 첫사랑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하면, 어렸을 적에 고모부는 저의 이상형 남편감이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그런 생각을 해보았을 거에요. 사람들에게 나는 커서 고모부같은 남편한테 시집갈 거에요라고 거침없이 말했으니까요. 흔히 딸들은 자신의 아빠같은 남편을 좋아 한다지요. 아빠와 딸의 관계는 특별하다고 하니까요. 저는 아빠보다는 고모부를  좋아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고모부의 친딸인 윤아는 우리 아빠를 좋아해서 봉주 아빠같은 남자한테 시집갈 거야했지요. 우리 아빠는 재미있지도 않았고 엄격하고 무서운 편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빠라서 그랬는지, 우리 아빠는 저의 작은 잘못에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혼을 내어 저를 상하게 했고, 그래서 저는 아빠를 무서워 했어요. 반면에 고모부는 항상 재미있는 이야기를 주었고, 사람들 앞에서도 유머 가득한 이야기로 항상 분위기를 북돋워 주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아빠에 비교하여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도 저는 고모부를 좋아했습니다. 고모부는 장난이 매우 짖궂어서 저를 놀리기도 많이 하셨고 어떤 때는 저를 울리기까지 했습니다. 한번은, 수박을 먹고 있었는데 수박씨를 삼켜 목이 불편해 하고 있는 저에게 고모부는 큰일 났다. 이제 수박씨가 속에 들어가서 싹을 틔우고 이파리가 나와서 속에서 수박 나무가 거야. , 수박 잎이 자라서 근질근질하지 않니? , 수박 잎이 나온다~~” 정말로 수박 잎이 몸으로부터 나오는 같아서 저는 와앙~”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제가 울음을 터뜨리는 보고 고모부는 재밌다고 웃고, 저는 무서워서 울었지요. 그후로 저는 수박이나 참외를 좋아합니다.

 

고모는 간호사였습니다. 고모가 근무하던 필동의 제일병원에 가서 고모를 때면 하얀 간호사 옷을 입고 머리에는 간호사 캡을 고모의 모습이 마치 천사처럼 보여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처럼 보였습니다. 저는 그런 고모를 좋아했고, 고모도 너는 커서 간호사가 되어라. 간호사가 되어서 나랑 같이 살자 말씀하셨습니다. 고모네하고는 정말로 친하여서 사촌이었던 석원, 윤아하고도 정말 친했었어요. 주말이면 고모네가 살던 필동과 우리집인 이문동을 왔다 갔다 하면서 놀러 다녔으니까요.

 

그렇게 좋아하던 고모, 고모부가 제가 중학생이었을 때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셔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석원이와 윤아랑 이상 만나게 되는 것도 서운했어요. 미국에 고모와는 편지로 자주 소통하였습니다. 석원이는 세계에서 제일 높다는 시카고에 있는 시어스타워에 올라가서 봉주네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인다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고모가 같이 살자 말이 현실이 되어 저는 그때에 미국에 유학하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고 고모네가 사는 시카고에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생활에 익숙하지 않아 모든 것이 낯설고 부모님과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 있고 친구들도 하나 없이 외롭고 향수병에 힘들었을 유일하게 왕래하며 힘이 되어 주시고 여러 모로 도와주셨던 분들이 고모와 고모부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를 교회에 다니게 하려고 고모네가 계신 곳으로 오게 했고, 이혼이라는 아픔까지 겪게 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모부는 평생을 YMCA 운동에 헌신하셨던 분이십니다. 한국에 계셨을 때는 서울 종로에 있는 YMCA 본부의 총무로서 YMCA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보이스카웃을 들여오시고 당시 전무하였던 레크리에이션을 소개하여 전쟁 직후 한국의 삶을 윤택하고 즐겁게 만드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다고 합니다. 6.25 한국전 때에 제주도에서 고아원 운동을 하셨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난지도에서 고아원 운동을 하셔서 전쟁 고아들을 돌보셨다고 합니다대광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하셨고 당시에 여러 가지 의미있는 사업을 하셨다고 합니다 중에 하나는 석유 방울 나는 우리 나라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니지 말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자는 캠페인을 했다고 합니다. 미국에 이민 오신 후에도 고모부의 YMCA 사업은 계속 되어 시카고에 한인YMCA 세우고 이민 초기의 시카고 한국 이민자들을 도왔다고 합니다. 돈을 벌어 부유하지는 못했지만, 평생을 길에 헌신하신 고모부를 나는 어렸을 적에 시집 가고픈 이상적인 남편감이라기보다, 이제는 훌륭한 분으로 존경합니다. 고모부가 하신 일과 개인적인 삶을 사람들은 성공적이었다고 말하지 않을 있지만, 이제는 그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받아 들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의 친부모님과는 제가 결혼 미국으로 살게 되면서 실질적인 거리로는 멀리 떨어지게 거리를 고모네가 채워 주셨습니다. 저는 그래서 고모와 고모부를 저의 정신적인 부모로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멀리 하려는 저를 붙잡아서 교회에 다니게 하셨고 하나님을 전해 주신 고모와 고모부가 저의 영적인 부모님이십니다.

 

지난 주에 고모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저희 부부가 엘에이에 살고 계시는 고모와 고모부를 것이 벌써 5 전이네요.  고모부는 번의 낙상 사고로 다리가 많이 약해 지셨고 보행기에 의지하여 힘들게 걷고 계신 남편이 부축하며 바닷가를 함께 산책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고모부가 좋아하시는 감자탕을 사드렸는데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뼈에 붙은 마지막 고깃살까지 깨끗하게 뜯어 잡수시는 모습에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시기를 바랬었지요. 그러고도 5년을 사셨으니 올해 춘추 94세에 소천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오르셨습니다. 간호사였던 고모는 마지막까지 고모부를 극진하게 보살펴 드렸고 가까이 사는 아들과 때마침 방문 중이었던 딸이 마지막을 함께 하였고, 당신 아래 둘의 형제, 자매 유일하게 살아남은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누이와 마지막 통화를 하시고 그날 아주 평안하게 숨을 거두셨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오직 YMCA 일만을 생각하셨던 고모부, 이젠 YMCA 걱정은 하지 마시고 하나님 곁에서 영원히 안식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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