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 <11>

by skyvoice posted Feb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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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가을의 선선한 체온으로 가득한 아침, 영화 "미션"에 삽입되었던 음악을 들으며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음악 속에서 가브리엘 신부의 순교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포르투칼 정부의 잔악한 노예 정책으로부터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품에 돌아온 원주민들을 지켜주지 못하는 교황청. 교황청은 오히려 사절단을 보내 가브리엘 신부님에게 선교지를 버리고 떠나 목숨을 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가브리엘 신부님는 사랑하는 원주민들을 포기하고 그곳을 떠날 없었습니다. 결국 가브리엘 신부님이 택한 방법은 무저항 행진이었습니다. 총칼을 들고 마을로 진격해 오는 점령군을 향해 신부님은 십자가를 들고 원주민 성도들과 함께 행진해 나갔습니다. 수없이 많은 총탄이 곁을 스치고 죄없는 원주민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갔지만 신부님의 발걸음에는 동요나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끝내 신부님의 몸을 파고든 총탄도 신부님의 얼굴에서 평화를 빼앗을 수는 없었습니다. 언제 떠올려도 감동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입니다.

 

형제님, 가브리엘 신부님과 원주민 성도들은 어떻게 죽음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할 있었을까요? 오늘 편지를 통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키에르케고르라는 덴마크의 신학자이자 철학자는 죽음을 , 어둠과 비교하며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은 밤의 어두움을 무서워합니다. 어두움의 정체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른들은 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밤이 되어 찾아온 어두움이 자신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을 훼손하거나 파괴할 힘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그저  주변의 것들을 보이도록 만들 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그렇게 설명할 있다는 겁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죽음을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무서워한다는 겁니다. 그들은 죽음 다음에 무엇이 있는지 짐작도 없는 겁니다. 그저 죽음이 가져오는 결과들, 관에 갇혀 땅에 묻히거나 불에 태워져 대기 중에 뿌려지거나 원래의 모습이 썪어 해체되어 가는 슬프고 끔찍한 장면들을 목격할 있을 뿐입니다. 언젠가 나도 저렇게 것을 생각하니 죽음이 소름끼치도록 두려운 겁니다. 철로 위에 온몸이 묶인채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는 기차를 무기력하게 그저 바라봐야만 하는 사람이 느낄 절망의 심정을 가지고 죽음을 대하고 있는 겁니다.

형제님, 오래전 의사인 성도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의사 생활을 하는 수많은 임종을 지켜보아 왔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끔찍한 표정이 있다는 겁니다. 레지던트 마지막 해에 암에 걸려 안타까운 죽음을 맞게된 여학생이었는데,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임종을 지켜주는 가족도 없었다고 합니다. 결국 혼자 임종을 맞았는데, 시신을 처리하러 아무도 방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답니다. 임종 후의 표정 때문이었습니다. 안타까움, 분노, 고통, 고독, 절망 등을 복합적으로 담고 있는 표정은 마치 지옥을 보는 같았다고 합니다. 형제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이런 겁니다.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분이 임종을 맞게 되었는데, 사랑하는 막내 아들이 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이렇게 부탁했다고 합니다. “의사 양반, 우리 아들이 때까지만이라도 생명을 연장해 주시요. 돈은 당신이 달라는대로 주겠오.” 그러나 죽음 앞에선 어떤 의술도 무력할 뿐이었습니다. 끝내 불쌍한 아버지는 아들을 보지 못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형제님,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이런 겁니다.        

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다르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성경을 통해 죽음이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영혼이 육신의 옷을 벗는 과정임을 아는 겁니다. 자신을 묶고 있던 육신에서 자유롭게 영혼은 하나님께서 계신 낙원으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사흘만에 부활하셔서 다시 하나님께서 계신 영원한 나라로 올라가신 주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땅에 다시 오실 우리도 낙원에 있던 영혼이 부활의 몸으로 입고 영원히 천국에서 살게 것을 분명히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분명히 깨어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믿음의 성도들이 자고 있는 무덤을 부활의 씨를 심어 장소라고 표현합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죽음이란 영원한 생명의 시작인 겁니다. 그러니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겁니다.  

 

형제님, 주님을 믿는 순간부터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축복이 임하는 겁니다. 바로 영원한 생명은 구원이라는 종합선물세트 안에 들어 있는 축복들 중의 하나인 겁니다.

 

형제님, 이제 가브리엘 신부님이 점령군의 총탄 앞에서도 당당하게 순교할 있었던 이유를 아시겠지요? 신부님은 구원을 통해 얻게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약속을 확실히 믿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원주민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생명을 걸고 남미의 깊은 정글 속으로 들어갈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자신과 믿음을 함께 하는 원주민들을 이끌고 평화의 행진을 있었던 겁니다. 설사 날아오는 총탄에 죽는다 해도 신부님도 원주민 성도들도 모두가 낙원에서 만나게 것을 분명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예외없이 죽음을 맞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이란 누구나 소유하고 싶은 꿈입니다. 꿈을 가능하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죄의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하셨기에 가능하게 겁니다. 죄의 대가는 사망인데, 죄의 대가를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갚아주신 겁니다. 이제 사실만 믿으면 누구나 죽음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외에 다른 방법은 땅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형제님, 단순하지만 분명한 진리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