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준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며칠 전 산책로에 들어섰을 때 평소완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곁에서 함께 걷던 아내가 그 느낌의 이유를 정확히 지적해주었습니다. “여보, 이젠 숲이 저 깊은 곳까지 잘 보이네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름에는 우거진 수풀로 무장해서 속을 내보이지 않던 숲이 이젠 옷을 벗고 있었던 겁니다. 그 풍경 안에서 순응이라는 미덕을 발견하는 한편, 속수무책의 무력함과 연약함도 발견하게 됩니다.
형제님, 우주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합니다. 변한다는 말은 그 안에 이미 연약함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아 보이는 밤 하늘의 행성들도 언젠가는 수명이 다해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연약함을 보완하고자 하나님께서 주신 이성을 사용해서 부지런히 과학과 기술을 축적해왔지만 태생적 연약함을 완전히 극복할 순 없습니다. 평소 보다 조금만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지면 그동안 쌓아놓은 것을 대부분 잃을 수밖에 없는 여전히 연약한 존재인 겁니다.
범위를 좁혀서 ‘나’ 자신을 들여다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상처 받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형제님,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본 적이 있나요? 이별을 통해서든, 아니면 사별을 통해서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면 창자가 끊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마치 폐인이 된 것처럼 몇 날 몇 일을 밥 먹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잊은 채 지내게 되는 약한 존재가 우리들입니다.
형제님, 혹시 믿는 사람으로부터 배신 당해본 적은 있나요? 배신의 아픔도 상실의 아픔만큼이나 독합니다. 마치 심장을 칼로 도려낸 듯한 정신적 아픔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약한 존재가 바로 우리들인 겁니다.
실패한 경험도 끔찍하긴 비슷합니다. 대학 입학 시험을 실패하고 패잔병처럼 방안에 웅크리고 지내던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부끄럽고 마음이 아픕니다. 극도의 실망감이 육신의 질병을 낳아 며칠을 고생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실패는 성공의 아버지라는 격언이 있지만, 일시적으로 겪어야 하는 심적 고통까지 치료해주진 못합니다. 그리고 한평생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실패와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또한 실패와 그에 따르는 고통에 내성이 생기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이토록 연약한 존재인 겁니다.
형제님, 성공도 아픔을 낳는다는 사실을 아세요? 그게 무슨 괴변이냐고 물을 수 있지만 사실입니다. 목표를 이룬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됩니다. 잘 나가는 거대 그룹의 오너를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통신 회사였는데, 그 기업의 오너는 향후 10년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등 또는 최고라는 기쁨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턱 밑까지 추격해오고 있는 수 많은 기업들과 불확실한 미래 사이에서 걱정과 염려라는 심적 고통을 토로하는 오너의 모습에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인생을 마치 무한한 높이의 산을 오르는 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작은 산등성이에 오른 기쁨은 잠시, 다시 올라야 하는 다음 목표를 심적 부담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하는 인간들. 그러다보니 영원한 만족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한 성공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한 겁니다.
형제님, 이처럼 인간은 치명적인 연약함에 눌려 지내고 있는 겁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훈련을 받은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믿던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 반대 세력에 잡혀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는 과정에서 그들은 인간적인 연약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시던 순간, 제자들은 다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수제자라고 자처하던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서 자기는 저 사람을 모른다고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죄인처럼 돌아가시고난 후에는 자기들도 잡혀가 똑같은 수난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며 지냈습니다. 염려를 덜고자 함께 모여 지냈고, 숨어지내는 집의 문들을 꼭꼭 닫아 걸었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는 자기 편이 없다는 생각이 낳은 절망과 고독 앞에 무릎 꿇어야만 했습니다.
형제님, 그런데 그들의 삶이 180도 변하게 됩니다. 연약함에서 완전히 해방된 모습으로 당당하게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했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음으로 이끈 장본인들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은 “메시아”라고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반대 세력의 무시무시한 협박도 소용 없었습니다. 제자들 중 요한을 제외하곤 다 복음을 전하다 순교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알리는 일에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았던 겁니다.
뒤늦게 사도로 불리움 받은 바울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늘 스스로 만족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달리 표현하면, 난 항상 행복하다고 고백한 겁니다. 세상의 눈으로보면 그의 삶은 환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신 구원의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전하는 과정에서 그가 겪어야했던 고통이 끔찍했기 때문입니다. 수 차례 감옥에 갇히고, 수 차례 매에 맞아 등은 다 찢어지고, 돌에 맞아 죽을 뻔도 하고, 배가 파선되는 바람에 죽을 고비도 넘겨야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늘 행복하다는 겁니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의 삶을 이처럼 바꾸어 놓았을까요?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인생으로 변화시킨 근본적인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형제님도 무척 궁금하실 겁니다.
답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형제님,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약속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성령 하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시겠다고 말입니다. 바로 구원이라는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선물입니다. 이 땅에 오신 성령님께선 믿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함께 하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지혜와 능력, 그리고 사랑은 무한하십니다. 그 성품으로 믿음의 사람들 모두를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늘 함께 하시는 성령님 때문에 믿음의 성도들은 연약함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형제님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음으로 성령님과 동행하시며 늘 행복을 누리는 축복을 누리게 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