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준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오랜만에 산책로에 나갔습니다. 한 일 마일쯤 걷다 보니 큰 나무 하나가 쓰러져 길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전날 밤 천둥이 크게 울리고 바람이 세차게 불던 기억이 났습니다. 저렇게 쓰러진 나무가 앞으로 겪어야 할 일은 뻔합니다. 산책로를 관리하는 직원들에 의해 운반하기 쉬운 작은 토막으로 분해되어 숲 안쪽에 버려지고 말 겁니다. 그 버려진 곳에서 남아 있던 생명을 소진하다가 죽게 될 겁니다. 형제님, 그들에게 물과 양분을 공급하는 어머니와 같은 대지로부터 한 번 분리된 나무는 되살아날 수 없습니다.
형제님, 아담이 범죄한 이후 아예 우리 인간은 예외없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채 이 땅에 태어납니다. 그래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대지로부터 분리된 나무처럼, 주어진 생명이 다 소진된 후에는 죽음을 맞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선 우리들 모두에게 창조주와 다시 연결될 수 있는 특별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열린 구원의 길입니다. 그분의 목숨값으로 이루신 구원이라는 이 특별한 사건을 믿기만 하면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할 수 있는 특권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과 하나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형제님, 구원은 기적입니다. 마치 뿌리가 뽑혀 죽어버린 나무가 다시 일어나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되살아나는 것과 같은 기적인 겁니다. 그래서 전 구원이라는 기적을 허락해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구원이라는 종합선물세트 안에 가득 담긴 축복들 중에서 하나를 끄집어내어 형제님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제 손에 들려나온 것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는 삶’이라는 축복입니다.
새벽마다 우리 교회는 말씀 묵상을 합니다. 언제 한 번 형제님도 참석하길 바랍니다. 오늘 묵상한 말씀은 시편 119편 81절에서 96절까지의 말씀이었습니다. 시편을 쓴 작가는 거의 매 절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말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환란이 가져다주는 고통의 크기가 엄청나다는 것만큼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시편 작가가 소망과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가 보았더니,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묵상하는 중에 발견한 큰 깨달음 때문이었습니다. 그 깨달음을 시편 작가는 ‘만물이 주의 종’이라는 표현을 통해 선포합니다. 이 우주를 이루고 있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종이라는 겁니다. 그러니 현재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도 하나님의 종임을 깨달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만 하라.”고 말씀하시면 당장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종임을 깨닫고는 기쁨과 소망을 노래할 수 있게 된 겁니다. 때가 이르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묶고 있는 것들을 말씀으로 풀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형제님, 어려움 가운데서도 우주 전체를 그분의 뜻대로 운영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시편 작가와 같은 삶이 바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떠올릴 때마다 수를 놓던 막내 고모님이 생각납니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고모님은 많은 시간을 수를 놓으며 보냈습니다. 수는 참 묘합니다. 수판 아래쪽을 올려다 보면 지금 어떤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형체를 알 수 없는 실들이 지저분하게 뒤엉켜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수판 위를 보면 새가 있고 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풍경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 겁니다.
형제님,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땅에 묶인 시선으로 우리의 삶을 들여다 보면 어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히 환난의 급류를 만나면 더 합니다. 모든 것이 다 그냥 엉망진창으로만 보이는 겁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요셉이라는 인물의 삶도 그랬습니다. 그의 삶은 17살이 될 때까지 그림같이 평온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심어주신 꿈 때문에 비전도 있는 괜찮은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시기심 때문에 장사꾼들에게 팔리고, 결국 낯선 땅인 이집트에서 종살이를 시작하면서부터 요셉의 인생은 엉망진창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잘 풀리는 것 같더니만 여주인의 무고로 감옥에 갇히고, 곧 풀려날 기회가 생기는 것 같더니 다시 몇 년을 더 감옥 안에서 보내야 하는 잔뜩 꼬인 인생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은 어릴 적 요셉에게 주셨던 꿈을 그 헝클어져 엉망진창으로 보이는 환경 속에서도 이루어가셨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종 출신이며 동시에 전과자인 요셉을 당시 최강국인의 이집트의 총리로 세워주셨고, 그를 통해 요셉의 가족 모두를 7년의 극한 기근에서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은 요셉은 동생을 종으로 팔아먹은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는 형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형들은 나를 해하려했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니 형들은 두려워 마십시요.” 요셉은 자신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분명히 깨달았던 겁니다.
형제님, 요셉 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선 바울이란 인물을 통해 이렇게 말씀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든 것이라는 표현이 큰 위로가 됩니다. 이 모든 것이라는 표현 안에는 좋은 일, 기쁨을 주는 일만 담겨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을 수 있는 환난과 고통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는 재료로 사용된다는 겁니다. 이 말씀만 믿으면 믿음의 성도들은 환난과 고통 중에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위로가 되는 겁니다.
형제님, 우리 주변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많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런 겁니다. 예수님을 믿게 되면 환난이나 고통을 겪지 않게 된다는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게 된 후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시험과 유혹과 환난을 만나게 됩니다. 단지 믿음 후에 달라지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자신이 당면한 힘든 상황과 환경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겁니다. 그 모든 재료들을 가지고 좋은 것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들은 고해라고 불리우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난 하나님 때문에 늘 기뻐하고 항상 감사할 수 있는 행복한 사람입니다.”라고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전 편지를 쓸 때마다 형제님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제가 누리고 있는 이 구원의 축복을 형제님도 누리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