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형제에게 보내는 편지 열 여덟번 째

by skyvoice posted Jul 2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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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추수감사절을 보내셨나요?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감흥이 없었던 사실입니다. 저와 아내에겐 여전히 추석이 가을 명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추수감사절이 다가오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주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아이들 때문입니다. 대학 때부터 이라는 둥지를 떠난 아이들이 다시 돌아와 가정의 모습을 회복하게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우여곡절 끝에 식구가 모여 저녁 시간을 훈훈하게 보낼 있었습니다. 기다릴 있는 가족이 있음이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 그리고 기다림의 이유를 제공해주는 추수감사절이 어느새 좋아진 겁니다.

째는 일년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감사의 조건들을 정산해볼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가족이 모여 해동안 체험한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며 감사함으로 가득한 저녁을 보낼 있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 둘째를 다운타운에 있는 집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굳이 메트라를 타겠다는 딸을 밤길이 위험하니라는 이유를 붙여 설득하고 아내와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프리웨이에 들어서서 보니 딸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을 영적으로 돌보는 사역과 시간이 들쑥날쑥한 때문에 지쳐보였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멀리 안개에 쌓인 도심을 바라보면서 시카고에서 보낸 20 가까운 시간을 소재로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딸을 내려주고 돌아오는데 문득 예배의 자유를 찾아 미국 땅까지 오게 청교도들의 스토리가 떠올랐습니다. 오늘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형제님과 나누고 싶군요.

 

매리 여왕 극에 달한 영적 박해를 피해 영국의 청교도인들 다수가 조국을 떠나게 됩니다. 자유롭게 예배드릴 있는 곳을 찾아 영적 순례를 시작한 겁니다. 처음 그들이 옮겨간 곳은 종교적인 규제가 느슨한 네덜란드였습니다.  

우리 이민자들의 생활이 고달프듯이 이방 땅에서 겪는 청교도들의 삶의 고통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까지 노동을 해야 간신히 먹고 있는 힘든 삶이었지만, 자유롭게 예배드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의 가슴은 감사로 넘쳤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네덜란드는 영적인 박해가 없는 대신, 세속적인 나라였습니다. 쾌락의 유혹이 도처에 널려 있었던 겁니다. 신앙의 심지가 뚜렷한 어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영적으로 아직 여물지 않은 자녀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주일 예배까지도 빼먹고 친구들과 방탕을 즐기는 자녀들의 수가 점차 늘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청교도인 일부는 다시 이사를 결심하게 됩니다. 그때 그들의 귀에 아메리카라는 미지의 땅에 대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나라가 형성되지 않은 그곳이라면 자신들의 신앙을 자유롭게 펼쳐갈 있을 같았습니다. 그때부터 뜻이 하나인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며 비용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7년동안을 기도하며 노력했을 하나님께선 드디어 그들에게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배를 빌릴 있는 비용이 마련된 겁니다. 빌린 배가 바로 메이플라워 호입니다. 배에 오른 101명의 순례자들은 1620 9 2, 드디어 미지의 땅을 향해 담대하게 출발합니다.

 

항해는 쉽지 않았습니다. 30 정도로 예상되었던 항해가 배인 60일이 지나도 끝날 기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만큼 일기가 좋지 않았던 겁니다. 그들의 도착으로 인해 변화될 미국의 미래를 미리 내다 사탄이 조무래기 마귀들을 동원해서 배의 항로를 막고 있는 같았습니다. 거센 풍랑 속에서 노약자와 아이들은 입으로, 또는 뒤로 오물을 쏟기 일쑤였고, 아이들의 울음 소리는 그치질 않았습니다. 그런 악조건 속에서 잠깐, 잠깐의 갈등과 위기가 있었지만, 믿음과 소망으로 이겨낼 있었습니다. 형제님, 드디어 배는 미국의 동부 해안 케이프 코드 근처에 도착하게 됩니다. 1620 11 11일의 일이었습니다. 소망의 대륙을 바라보면서 이들은 감사의 마음을 모아 “Mayflower Compact”라는 선언문을 작성합니다. 핵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땅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생활한다.”

 

배를 댈만한 곳을 찾아 항해를 계속하다가 마침내 육지에 첫발을 딛은 때는 12 20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길을 받아준 땅의 이름을 출발했던 항구의 이름을 따서 플리머스라고 붙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플리머스는 그들이 원했던 목적지가 아니었습니다. 기후 조건이 좋은 플로리다 해변을 향해 건데, 북쪽에, 그것도 겨울에 도착했으니 그들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은 셈입니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먹을 것이 부족한 상태로, 또한 추위 가릴 것도 제대로 없이 겨울을 나는 동안 101 55명만 남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자녀, 배우자, 부모, 그리고 친구가 자신의 곁에서 떠나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것만큼 힘든 일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한 예배를 드리려고 고생하며 달려온 길인데끊임없이 계속되는 시련 앞에서 그들은 절망하고 원망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엄청난 고통과 시련의 시간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선 오래전부터 이들을 위해 일하고 계셨습니다.  청교도인들이 정착한 땅은 4년전만해도 파툭샡이라는 인디안들이 살던 곳이었습니다. 지역은 다른 부족도 탐낼 정도로 아주 비옥한 땅이었지만 아무도 근처에 얼씬거리지 못했습니다. 파툭샡이란 부족이 그만큼 잔인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4년여 무서운 전염병이 돌아 부족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후 땅은 저주받은 땅으로 알려져 아무도 접근하질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선 하나님만 바라보고 달려오는 자녀들을 위해 가장 비옥한 땅을 이미 준비하고 기다리고 계셨던 겁니다. 형제님,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주변 인디언들을 통해 청교도인들이 정착할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스쿠안토라는 인디안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파툭셑 부족 사람이었는데, 영국 상인들에게 번이나 잡혀 노예로 팔린 경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 전에 돌아와 자기 종족이 죽은 것을 발견하고는 슬픔과 술에 젖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역 사정에 대해선 누구보다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청교도인들에게 농사짓는 방법, 강에서 고기 잡는 등을 가르쳐 주어 빠른 정착을 도왔습니다.   

1621년의 가을은 풍성했습니다. 가을걷이로 풍요로운 들판을 바라보던 청교도인들의 가슴은 감사와 기쁨으로 가득 했습니다. 가만히 있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축제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그들을 도와준 인디언 부족 왐파노아 족과 추장 맛사소이를 초대했습니다. 드디어 감사의 축제는 시작되고, 예배와 친교를 통해 그동안 그들의 발걸음을 구체적으로 인도하고 축복해 주신 하나님께 마음껏 영광을 돌렸습니다. 바로 미국 땅에서 드려진 추수감사예배였습니다.

 

형제님, 어때요? 가슴이 훈훈해지지 않습니까? 연말을 맞는 형제님의 영혼도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찬송으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다음 편지를 드릴 때까지 주님께서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가득한 하루하루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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