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된 Mary Phagan과 Leo Frank 린칭
2차 KKK를 재건한 SImmons
1920년대 2차 KKK의 모습
<김 신 교수>
우리는, 시카고역사 이야기 #40-44에 걸쳐 금주시대 미국을 살펴보았다. 미국의 “금주시대”는 18차 헌법수정안 (금주헌법)이 발효된1920년1월17일 부터 21차 헌법수정안 (금주헌법의 폐기)이 36개주의 비준을 얻은1933년 12월 5일까지 지속되었다. 21차 헌법수정안의 좀 더 정확한 표현은 “금주 연방 헌법의 폐기”여서, 21차 헌법수정안으로 금주법이 다시 로칼, 또는 주 정부 관할 사항으로 원상 복귀되었다.
18차 헌법수정안이1년 조금 넘는 기간에 36개 주 비준을 받은1919년1월16일에 확정되었고 1년 후에 발효된 것도 엄청 놀라웠는데, 21차 헌법수정안은 1933년 2월 20일에 연방국회를 통과한 지 9개월 15일 만인 1933년 12월 5일에 36개 주에서 비준이 확정되자 곧장 발효되었다. 18차와 21차 헌법수정안의 통과되어 발효된 속도만 비교해도, 연방 입법을 통한social engineering의 비효율성 (inefficiency)이 눈에 띈다.
오늘부터, 1920년대에 미국 (Jim Crow 사회 남부지역을 제외한 동부, 중서부, 서부)을 휩쓸었던 2차 Ku Klux Klan 운동을 살피는데, 이는, 금주법과는 아주 다른 양상으로 동 시대1920년대의 미국 사회를 특정 지었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Ku Klux Klan하면 흑인들에 대한 ‘묻지마 처형(lynching)’과 흰색 가운과 고깔모자, 불타오르는 십자가를 연상할 터인데, 흑인에 대한 묻지마 lynching은 남북전쟁 직후부터 1870년대에 남부 지역에서 만연한 1차 KKK의, 그리고, 흰 가운, 모자, 십자가는 오늘부터 살펴볼 1915-1930년대의 2차 KKK의 주요 상징이다.
참고로, 1차KKK는 1861-65년의 남북전쟁에서 남부연합 (the Confederacy)이 패하자 연방군대가 남부지역을 점령하고, 남부 로칼과 주의 정치체제를 올 스톱시키며 펼친Reconstruction에 반발하여 테네시 주에서 남부군 퇴역군인들 (veterans) 5명이 시작한 민간 백인의 저항 운동이다. 1차KKK는 여기저기 지역의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과 흑인들을 옹호하는 연방정부, 그룹들에게 화풀이하는 충돌 (prank)로 시작하다가 남부 전역에서 온갖 불법 테러행위를 벌이자, 1871년에 연방국회에서 KKK 금지법이 통과되어 법적 제재를 당했다. 그러나, 1877년에 정치협상으로 연방군대의 남부지역 점령이 끝나면서 (즉, Reconstruction 종결) 여러 남부 주정부에서 공공연하게 Black Codes를 더 강화한 Jim Crow Laws 로써 극심한 흑인 차별과 흑백의 철저한 분리를 성취하니 민간 운동이었던 KKK는 존재 필요가 없어지며 잠잠해졌다. 그리고, 연방대법원이 1892년에 “Plessy v. Ferguson”으로 남부의 Jim Crow Law의 합헌으로 판결하면서, 1964-1965년 “Voting & Civil Rights Acts”의 통과까지 남부에서는 흑인 처우에 관하여는 서로 상반되는 연방법과 주법이 공존하는 사태가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가? 얼마든지Yes! 지금도.
먼저, 2차 KKK가 어떤 경로로 시작되었는지 역사를 살펴보자. 공식적으로는, 1915년 추수감사절에 Wm Simmons의 주도하에 아틀란타 Stone Mtn 정상에서 불타는 십자가를 밝힘으로 KKK가 재건되었다. 실질적으로는, 1913년 4월 26일, 아틀랜타에서 일어난 Mary Phagan의 실종, 살해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왜냐하면, The Knights of Mary Phagan을 근간으로 2차 KKK가 조직되었으니까.
좀 더 자세히 보자. 당시, 그녀가 13살이었는데, 불법이라고? 아니다. 1913년에 조지아주의 Child Labor Law는 12세까지만 커버했다-- Mary Phagan은 Confederate Memorial Day인 1913년 4월 26일, 토요일에 그 일주일의 급료를 받으러 자신의 직장인 American Pencil Company에 갔다. 공휴일인 관계로 공장은 닫혀 있으나, 매니저 Leo Frank은 재정보고와 급료 배분을 위해 근무하고 있었다. 정오 경에 Frank에게서 급료를 수령한 Mary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 이튿날 공장경비원 Newt Lee에 의해 공장 지하실에서 강간 살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시신 근처에서 Negro라 쓰인 것 같은 쪽지를 2개 찾았다. 언론은, ‘13살의 청순한 백인Mary, 꿈도 펴 보지 못하고 무참하게 살해되다’ 같은 센세이셔날한 기사를 그녀의 사진과 함께 연일 연재한다.
경찰이 최초로 용의자로 지목한 사람은 시신 발견자인 Newt Lee. 그러나 알리바이로 용의자에서 곧장 제거된다. 경찰이 그 다음으로 소환한 사람은 그날 회사 사무실에 있었던 Leo Frank. 물론, Frank도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공장 청소원인 흑인 Jim Conley가 피 묻은 셔츠를 씻고 있는 것이 목격된다. 소환된 Conley, 자신은 문맹자라며 쪽지를 쓸 수 없다고 부인했다가, 매니저 Frank의 지시로 썼다고 하고, 다시 그렇지 않다고 번복을 거듭한다.
그런데 얼마후에, 아틀란타 경찰은 북동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이 공장 매니저로 내려온지 얼마 안 되는 유대인 Leo Frank를 범인으로 체포한다. Frank는 유대인1세 (이민자 부모의 미국태생 자녀, 지금으로는 유대인 2세. 1965년까지 정부에서는 이민자의 미국 태생 자녀를 1세로 분류했다)인데, 생소한 남부 사회환경에 적응이 힘들었는데, 경찰은 Frank가 예민한 (nervous) 태도를 보였다고 주장했다. 본인은 무죄를 주장하고, 물증은 없고, 유일한 증인인 정신지체 청소원 흑인Jim Conley의 증언이 들쑥날쑥 번복을 거듭하여 신빙성이 제로인데도, 그는 1913년 8월 사형 언도를 받았다. 2년간 상소가 거듭되었다. 재판을 지켜보며 배심원 판결의 부당함을 느꼈던John M. Slaton조지아 주지사, 많은 인사들의 탄원서를 받자 Frank의 형량을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면한다. 이에 분노한 로칼 군중들이 폭도가 된 가운데, 백인 지역주민 남성 24명이 The Knights of Mary Phagan을 조직하여 조지아 감옥소를 침입, Leo Frank를 납치해서, Phagan의 동네 나무에 매달아 폭행하고 밟아 죽인다. 1915년 8월 17일의 일이다.
타 지역, 특히 비백인들은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서부활극같은 사태에 어이없어 했지만, 백인사회에서는 ‘속절없이 당한 백인소녀의 원한을 백인 남성들이 갚아주었다’는 센티멘트가 은연 중에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들의 사고 저변에는 ‘순결한 피해자=백인, 미국태생, 소녀, insider,’ 이고 ‘흡혈귀 같은 가해자=유대인, 이민자, outsider’라는 등식과 백인우월주의 (White supremacy)가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드는 질문 하나: 왜, 흑인이 아닌 유태인을 살인자로 지목했을까? 이를 이해하려면, 다음 컬럼에서 다룰1880년 후의 소위 새로운 이민자를 향한 미국의 원주민주의 (Nativism)을 살펴야 한다.
2차 KKK 재건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던 영화가 1915년에 개봉된 “Birth of a Nation”이다. D. W. Griffith가 만든 이 영화는 Thomas Dixon의 소설 “The Clansman” (1905)을 각색한 것인데, 개신교 목회자이며 백인우월주의 신봉자인 딕슨은 이 소설에서 1차 KKK가 남부 문화를 ‘동물 같은 흑인’에 의한 파멸에서 구해주었다고 주장하였다. 당연히, 영화도‘범법자 그룹 흑인에게서 백인을 구한 구세주는 1차 KKK였다’는 망상을 널리 퍼트렸고, KKK 재건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리하여, 1915년 10월, 전직 목회자였던 William Simmons가 The Knights of Mary Phagan을 포함한 34명의 백인 남성을 Knights of the Ku Klux Klan으로 세우고, 추수감사절에 Stone Mtn 정상에서 불타는 십자가를 밝히며 KKK 재건을 공포한다. Wm Simmons는 뾰족한 모자, 흰 가운, 마스크, 불타는 십자가 와 직책을 철저하게 코드화 (code)하고, 지키도록 했다. 1922년부터는 치과의사 Hiram W. Evans 가 Imperial Wizard 되어 2차 KKK를 끌어가면서 Simmons가 제정한 code화와 흰 가운, 모자, 불타는 십자가를 철저하게 따르며 2차KKK를 비밀조직으로 키운다. 다시 말하면, 2차KKK는 몇 리더들을 제외하고는 익명성이 생명이었고 부흥 원동력이었다. 2차 KKK를 “Invisible Empire”라 부르는 연유이다.
2차 KKK의 직책 타이틀, 인사법들도 아주 비밀스럽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창시자 Simmons 은 Emperor이지만, 그 후의 National Klan의 대표는 Imperial Wizard (Wizard라 약칭하기도 한다). Imperial Wizard가 임명하는 각 주 Klan (Realm)의 우두머리는 Grand Dragon. 로칼 Klan의 실내 모임장소는 Klavern. Klan 멤버인지 분별하는 인사말도 non-member에게는 암호로 들린다. 즉, Ayak, “Are you a Klansman?”; Akia, “A Klansman I am”; Kigy, “Klansman, I greet you” 등등.
이렇게 시작된 2차 KKK는 1920년6월, Elizabeth Tyler 와 Edward Clark의Southern Publicity Association 이 2차KKK의 이미지를 [1차 KKK의 ‘야밤의 무법자’에서] ‘독실한 개신교인들의 미국 구국그룹’으로 완전 탈바꿈하기 전까지는 그리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미지 쇄신으로 인해 독실한 개신교인이라면 KKK에 어떤 형태로라도 동조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시작해서 1920년 후반기부터 2차 KKK는 미 전국에서 불붙기 시작한다. 1924년이 되면 내륙 48개 주 모두에 지부를 두고 4백만에서 6백만까지의 멤버십을 가지게 된다. 이들을 반대하는 기독교인들과 그룹들도 많았지만, 그보다는 KKK 멤버들이 신교 부흥집회 (Billy Sunday)와 교회에 깊이 참여하며 공개초청을 하면서 KKK멤버십이 늘어갔다. 자연히, 정치인들의 러브콜 (love call)이 봇물 터졌는데, 2차KKK의 익명성 보장과 활발한 기관지 사업으로 KKK는 더욱 더 커지게 되었다.
시작은 남부 (아틀란타)에서 이지만, 북부, 중서부, 서부에서 특히 강했던 2차 Ku Klux Klan운동의 모토는 “미국은 ‘100% 아메리칸’ 만을 위해서 존재하여야 한다” 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잠식되어가는 ‘Christian America’를 지키고 전통적, 청교도적 도덕성을 지키는 자 (즉, 100% 미국인)라고 생각하여서, 좁은 의미의 백인우월주의 (white supremacy)를 기초로 반-카톨릭 (anti-Catholic), 반-유태인 (anti-Semitism), 그리고 반-이민(anti-immigrants) 주의를 신봉했다. 이 중에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Anti-Catholic이다. 카톨릭은 식민지 시대부터, 그리고 미 건국에도 함께 했는데, 왜? 이에 대한 학자들의 변론도 각양각색이다.
여하간, 개신교 목회자들이 리더로 많이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백인 여성과 아동’을 비백인 영향에서 보호하여 무너져가는 미국의 도덕성을 재건하여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단단히 뭉쳐 있었다. 개신교의 부흥집회 같았던 Klan모임에서 가장 애창한 찬송이 ‘십자가 군병들아’ 이다. 그래서인지, 필자는 이 찬송을 부르면 많이 불편해서 속상하다. 휴~
2차KKK는 전략적으로, 전국보다는 로칼의 교육과 정치 선거에 초점을 두어 여러 지역 로칼과 주의 정치와 교육 시스템을 장악한다. 이 면에서 중서부에서는 인디애나가 특히 유별나서, 1925년 정도 되면 인디애나 주의 거의 모든 로칼 정치와 교육 시스템을 장악한다. 그래서인지, 인디애나 Klan에 대한 연구가 많다.
시카고 지역에도 시내에 20개, 시외에 12개의 Klaverns (chapters) 와 어느 대도시보다 많은 50,000명 의 멤버십(Klansmen)을 자랑했다. 시카고 지역의 정기간행물 ”Dawn: A Journal for True American Patriots”이 꾸준히 발간되었다. 동시에, 새로운 이민의 도시 시카고에는 반-KKK 활동이 활발했다.
2차 KKK는 교황을 미국의 종교심을 약화시키는 적-그리스도의 괴수로 지적하여 1920년대 교황의 미국 방문이 전면 저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