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준 목사 / 두란노 침례교회>
안녕하세요, 형제님.
한 연구소에서 이런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실험 대상의 사람들에게 똑같은 액수의 돈을 나누어주고,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눈 후, A 그룹에 속한 사람들에게는 나누어 준 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도록 했고, B 그룹의 사람들에게는 그 돈을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약속된 날짜에 A, B 그룹의 사람들이 다 모였을 때 그들의 행복 지수를 확인해 보았다고 합니다. 형제님, 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돈을 사용하고 돌아온 B 그룹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자기 자신을 위해 돈을 사용하고 돌아온 A 그룹의 사람들 보다 높게 나왔다고 합니다. 의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실험을 통해 자기 만족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인 삶 보다 자신이 가진 것을 이웃들과 나누는 삶이 영적으로 더 건강하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나누는 삶이 더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 겁니다.
한 종교 지도자가 예수님께 나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 중에서 가장 큰 명령은 무엇입니까?” “가장 크고 첫 번 째 되는 명령은 우리들의 몸과 마음과 생명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겁니다.”예수님의 대답은 여기까지로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가장 큰 명령이 무엇이냐고 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어서 두 번 째로 중요한 명령까지도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사랑하는 만큼 여러분의 이웃도 사랑하십시요.” 그리곤 이어서 이런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죽도록 맞고 가진 물건과 옷까지 다 빼앗긴 채 버려진 불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태로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그런 위급한 상태였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알려진 사람이 그곳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주위를 둘러보더니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자 자기도 이런 일을 당할까 두려워 줄행랑를 치고 맙니다. 두 번 째 사람이 지나갑니다. 그는 유대교 최고의 지도자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누구 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으니, 이제 불쌍한 사람의 불행은 이제 끝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도 주변을 둘러보더니 황급히 도망치듯 가던 길을 가고 맙니다. 세 번 째로 등장한 사람은 사마리아 인이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 개보다도 못한 민족이라고 멸시를 당해온 사람들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민족 사이엔 감정의 두터운 벽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 한국과 일본 사이에 쌓인 민족간 갈등보다 더 심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맞은 유대인을 돕는다는 건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비유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은 상식을 벗어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자에게 필수품인 기름과 포도주를 아낌없이 꺼내 강도 맞은 자의 상처에 쏟아 부으며 치료했습니다. 응급조치가 끝나자, 그 불쌍한 사람을 자신의 나귀에 태워 가장 가까운 여인숙으로 가서 보살펴 줍니다.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되자, 착한 사마리아 인은 길을 떠나면서, 여인숙 주인에게 불쌍한 이웃의 숙박비를 미리 내주며 부탁을 합니다. “잘 보살펴 주세요. 만약에 저 분을 돌보는데 제가 지금 드린 돈 보다 더 많이 들어가게 되면 돌아오는 길에 들러 그것까지도 정산해 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마치신 예수님은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라고 생각합니까?” 형제님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어요? “여러분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동했을까요?”라고 묻지 않으신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묻지도 않은 이웃 사랑의 계명을 일깨워 주시고 또한 비유를 통해 그 중요성을 더 깊이 깨우쳐주신 이유가 뭘까요? 인간을 창조하셔서 우리 보다 우리 인간을 더 잘아시는 주님께선 이 둘 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부담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큰 행복을 가져다 주는 길임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형제님, 기억하시겠지만, 우리는 지금 교회를 섬기는 일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알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일들 중에 하나가 바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겁니다.
A.D. 249년 데시우스가 로마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교회에 대한 박해가 더 심해졌습니다. 국가 차원에서 조직적인 박해가 추진되었고, 박해의 목적은 배교였습니다. 즉 잡아들인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형벌을 면해주는 정책을 통해 교회를 흔들었던 겁니다. 끔찍한 형벌을 피해 많은 교인들이 배교하는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도 교회는 계속 성장합니다. 바로 이웃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251년 로마 제국은 위기를 맞게 됩니다. 페스트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귀족과 정치 지도자들은 필요한 조처를 취하기 보다는 자기와 식구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병이 없는 곳을 찾아 도망가기 바빴습니다. 거리 거리 마다 버려진 시체들로 가득했고, 병의 증상이 있다 싶으면 인정사정없이 내다 버리고 말았습니다. 버려진 병자들은 소망없이 죽는 순간만 기다려야 했습니다.
이 때 교회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주님의 사랑을 품고 전염병이 창궐하고 있는 거리로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거리로 나간 성도들은 병자들이 크리스천이든 이교도이든 상관하지 않고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페스트는 전염성이 강한 질병입니다. 그러니 거리에 나가 병자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았습니다. 그런 이유로 가족들로부터도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인들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로마 시민들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파라볼라노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파라볼라노이의 사랑 실천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 제국의 조직적인 박해 때문에 복음을 말로 전할 순 없었지만, 주님의 사랑을 손과 발로 직접 실천함으로 초대 교회는 더 큰 부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자신이 돌보는 환자들이 생명을 얻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또한 핍박 속에서도 오히려 교회가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파라볼라노이라고 불리운 성도들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자신의 몸처럼 이웃을 돌보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축복인 겁니다.
형제님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파라볼라노이의 삶에 동참하시길 바랍니다. 교회의 사역들을 잘 살펴보면 함께 동역할 수 있는 기회들이 얼마든지 있을 겁니다. 그래서 행복 가득한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형제님의 하루 하루가 하나님 부어주시는 축복으로 가득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림 설명: <로마의 역병>, 쥘 엘리 들로네 작(1869년)